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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계서원은 사천읍 구암리 만죽산 기슭에 자리하고 있다. 향교가 고려시대부터 조선에 계승된 지방의 공공교육기관이라 한다면 서원은 조선 중기에 보급된 지방의 사학기관으로써 유현의 위패를 모시고 유림(유학자)들의 학문을 장려한 기관이라 하겠다. 조선시대는 건국초부터 육영에 힘을 써 고려시대의 사원을 대신하여 서재, 서당, 정사, 선현사 등을 장려하였다. 중종 37년(1542) 풍기군수 주세붕(곤양군수를 지낸 바 있음)이 순흥에서 고려시대의 학자 안향을 모시는 사당을 짓고 이듬해 백운동서원이라 한 것이 우리 나라 최초의 본격적인 서원이었다. 이후 소수서원이라는 액을 하사 받아 최초의 사액서원(임금이 이름을 지어 하사된 서원)이 되었으며, 또한 황폐되어 가던 향교를 대신하여 국가의 보조를 받는 사원이 각처에 설치되었다. 이상으로 살핀 바와 같이 구계서원은 명종 때 높은 벼슬을 두루 거친 문신(문관인 신하)이자 학자인 구암 이정선생을 기리고 향사(제사를 지냄)하기 위하여 건립한 것이다. 처음은 이정선생이 별세한지 40년 만인 광해군 3년(1611)에 유도를 닦는 학자들과 고향의 마을 사람들이 그를 추모하기 위해 향리인 만죽산 아래에 구산사란 사당을 지었다.
이후 인조 23년(1645) 4월에는 사천 사림(유학자)들의 소청(임금에게 알리어 청함)으로 나라에서 구계라는 액호가 내려 이때부터 사액서원으로 승격되었다. 그로부터 190여년이 지난 고종 5년(1868), 대원군이 섭정(임금을 대신하여 나라를 다스림)하자 전국에서 사표가 되는 47개의 사액서원을 제외하고 그 나머지 미흡한 사액서원은 모두 철폐 당했다. 그러다가 60여 년이 지난 1931년 봄에, 대관대유계의 힘으로 지금의 자리에서 서원이 복건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1963년 12월에 사단법인체로 등록되고 이어 1983년 8월 6일에 도지정문화유산자료로 지정되었다. 현재 서원에는 이정선생과 대사헌의 벼슬을 지낸 성옹 김덕함선생 두 분의 위패를 모셔 놓은 묘당(사당)과 뜰 아래에는 구산사비를 비롯하여 김덕함, 최관두 선생의 기적비가 나란히 서 있고, 또 내삼문(금기문) 밖에는 동재, 서재, 풍영루 등의 건물이 있다. 그리고 구산사비에 새겨 놓은 비명은 숙종 때 우의정을 지낸 바 있는 양천사람 미수 허목이 지었다. 명에 가로되 ‘명은 물에 근심하였기에 제사하며, 용은 땅에 근심하였기에 제사하노라’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