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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천향교는 사천읍 선인리 119번지 성전봉 기슭에 위치하고 있다. 당초의 향교터는 지금의 정동면 풍정리에 있었다고 전해오나 확실하지 않고, 다만 옛날의 고현지(옛 읍터)가 현 정동면 고읍리에 있었음을 감안할 때 추정이 가능할 뿐이다. 향교는 고려시대부터 조선에 계승된 지방의 학교로서 오늘의 중 · 고등학교에 해당된다. 일명 교궁 또는 재궁이라고도 하는데, 조선조에 이르러 교생을 가르치고 인재를 길러내기 위하여 부, 목, 군, 현 등 고을마다 1교씩 이른바 대설위, 중설위, 소설위 등의 3등급으로 나누어 큰 고을에는 교수 · 훈도 각 1명씩, 작은 고을에는 훈도만을 두었다.
그리하여 같은 왕 34년(1758)에 여러 스님이 또 합심하여 명부전과 대양루사왕문을 중건했다. 그런데 1914년 12월에 또 한번의 대화로 모든 전각이 불타는 불운을 겪었으나, 이 때 유독 대양루만은 그 화를 면하여 오늘에 이른 것이다. 이 누각은 맞배지붕의 2층으로 된 목조 기와 지붕으로서 높이가 13m나 되며 36개의 아름드리 큰 기둥이 무거운 몸체를 떠받치고 있다. 처음 건축 당시에는 사왕문이라 하여 아래층은 출입문 구실을 하였으나 뒤에 건물 왼편에 돌계단이 새로 생기면서 지금은 칸막이로 창고와 기타 용도로 이용되고 있다.
위에서와 같이 사천향교는 ‘전학후묘형’의 소설위 향교로서 훈도(선생) 1명에 교생은 30명이었다. 다음 사천향교의 내력을 살펴보면, 세종 3년(1421)에 향학당 창건을 시초(전학)로, 같은 왕 22년(1440)에 치성재·동서양재·명륜당 등을 짓고 (후묘) 향교로서의 모습을 갖추었다고 한다. 그 후 세종 32년(1450)에는 풍화루를 지었으나 임진란 때 병화로 불타버리고 인조 23년(1645)에 다시 지금의 자리에 재건하였다. 그 후 여러 차례 중수를 거듭해오다가 1983년 8월 6일 도지정유형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재 대성전(문묘)에는 공자(孔子)를 정위로 하여 안자, 자사는 동무(동편)에, 증자, 맹자는 서무(서편)에 모두 5성을 모시고, 다음은 송조 2현과 우리나라 18현도 서열에 따라 동과 서로 나누어 각각 10현씩 위패(묘당·절 등에 모셔두는 나무 패)를 봉안하고 있다. 이와 같은 향교는 먼저 학당이 생긴 후 문묘가 다음으로 설치되었다는데, 조선 중기 이후의 향교는 과거의 준비장으로 되어지다가 서원이 발흥하게 되자 점차 쇠퇴하였고, 고종 31년(1894) 말에 과거제도의 폐지와 함께 향교는 완전히 이름만 남아 지금은 문묘를 향사(제사)할 따름이다. 그리고 문묘향사와 건물관리를 위하여 전교(향교의 대표자)를 두고 있으며, 봄 · 가을 두 차례에 걸쳐 석전제라 하여 문묘제사를 지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