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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산 마을 어귀에 남녀 돌장승(벅수) 8기가 있다. 문화는 전파의 경로도 중요하겠지만 사람들이 어느 것을 더 많이 골라서 생활하고 있고 정착시키고 있는가가 더 중요할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옛 "조창마을"이라 일컬었던 지금의 가산리는 좀 특이한 마을이었던 것 같다. 그것은 대개의 마을이 그러하듯이 마을 어귀에 남녀로 구분되는 장승이 2기뿐인데 비하여 이곳은 조창마을이란 특수성 때문인지는 모르나 무려 8기나 된다는 점이다. 옛날 음력 정월 대보름만 되면 아침부터 온 마을이 술렁대기도 했다. 이는 오래 전부터 한 해도 거른 일이 없는 장승제를 지내기 위해서인데 우리 고장에서 특히 가산마을이 그러한 것 같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가산마을은 조운지로서 조창이 폐지될 때까지 해마다 조운선에 세곡을 싣고 3월 25일까지 서울로 운송했다. 이때 이곳에 있던 조당에 각 고을 관원들이 모여 조곡이 서울에 무사히 안착하기를 기원하는 제사를 출항하기 전에 지냈다. 그리고 돌장승에도 제물을 차려놓고 제사를 지냈다 한다. 이렇게 볼 때 가산마을에 돌장승이 많이 있었던 이유를 짐작하게 한다. 한편 오늘날 우리나라 지명에 장승마을·장승백이·장승리·장승포·장생포라고 하는 곳은 옛날 그 마을이나 갯가에 장승이 서 있었음으로 해서 그러한 이름이 생겨났던 것이다. 장승은 마을 어귀나 절 입구 등에 세워놓아 이정표·경계표지로서의 기능과 액막이 수호신으로서의 기능을 갖고 있었다. 또 장승을 병마와 악귀신을 막는 수호신으로 삼고자 했다.
장승의 원말은 도교의 신선사상으로부터 취한 불로장생이란 말이었다고 한다. 장승은 주로 화강석과 소나무로 만드는데, 나무장승의 몸 기둥에는 천하대장군·지하여장군의 글씨가 새겨져 있다. 돌장승의 명칭은 지방마다 다르다. 영남과 호남지방에서는 벅수, 제주도에서는 돌하르방·우석목이라고 하는데, 특히 남해안 갯가에 돌장승이 많았다. 현재 가산리에 있는 돌장승은 키가 겨우 1m 내외로 폭이 50㎝, 두께 30㎝ 크기로 앞뒷면을 조각하여 관복을 입힌 것이 특이하다. 그리고 손에는 홀(관복에 갖추어 손에 쥐던 물건)을 쥐었으며 남장승은 관모를 쓰고, 여장승은 머리 위에 뿔같은 모양을 하여 무덤의 동자석과 비슷한 모습으로 남녀 2쌍씩 포구가 있던 나무 아래와 마을 어귀에 서 있다.